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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년을 위한 추모사와 발간사
이번 호 {문화과학} 발간사는 추모사가 되어야 한다. 정기간행물의 발간사를 추모사로 만든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일지 모르나 사실 모든 발간사는 추모사라 할 수 있다. 책의 생김새로 인해 가장 먼저 읽을 앞 부분에 배치되지만 발간사는 '뒤늦은' 글이다. 이때 '뒤늦음'은 발간사가 함께 출발한 다른 글보다 더 굼실거리며 뒤늦게 도착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청탁과 집필의 시간대를 놓고 볼 때 발간사는 같은 책의 다른 글들과는 작을지는 몰라도 본질적으로 중요한 차이를 하나 가지고 있다. 다른 글 대부분을 읽고 써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발간사의 뒤늦음은 따라서 실수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같은 책 속에 실린 글들 사이에 이질적 시대, 다른 시대가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아마도 발간사에 대한 윤리적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왜 발간사에는 다른 글보다는 꼭 늦게 와야 한다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일까? 발간사란 다른 글들의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발간사가 작성되는 시점은 다른 글들이 적어도 한 번은 그 소임과 일생을 마친 뒤다. 발간사를 쓸 때 같은 책에 실린 다른 글들은 적어도 한 번은 독파되었기 때문이다. 발간사가 추모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추모사가 대체로 그러하듯 발간사도 다른 글들의 일생에서 의미와 가치와 교훈을 끌어낸다.
발간사는 살아남은 글, 살아남은 자의 글이다. 다른 글의 필자들은 이미 필자로서의 소임을 다 마친 상태다. 지금은 다른 글들을 쓰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번 책에 실리는 글에 한해서는 의무를 완성한 필자, 필자로서의 생을 한 번 마친, '죽은' 필자인 것이다. 반면에 발간사를 써야 하는 필자는 아직 '생존한' 상태에 있다. 그에게 발간사는 아직 쓰지 못한 글, 앞으로 써야 할 글이다.
죽은 자를 앞두고 있을 때 살아남은 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애도요, 추모다. 애도와 추모를 단순히 슬퍼함으로 볼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의 인생이 지닌 의미를 곱씹는 일, 그의 행적과 일생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그래서 더 잘 살아가려는 노력이다. 발간사가 추모사인 것은 같은 책의 세계 속에서 먼저 완성된 글들의 가치, 그것들의 '일생'이 지닌 의미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호 발간사가 꼭 추모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문화과학} 창간이래 편집자문위원으로 큰 도움을 주시던 김진균 선생께서 그저께(2월 14일) 세상을 뜨셨다. 대장암으로 오래 고생을 하셨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몰랐기에 이 애통함을 어디 견주랴. 선생은 민주사회장을 받을 만큼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지만 {문화과학}과도 인연이 깊다. 밤을 새우다시피 한 세 차례 모임으로 만든 창간좌담 [현단계 자본주의 문화현실과 과학적 문화이론의 모색]과 9호의 [한국 고등교육 개혁의 방향] 좌담에 참여해 주셨고, 특히 34호 특집 '한국의 지식, 지식인'을 위한 [한국의 학문 어떻게 할 것인가] 좌담에는 대장암으로 투병 중인데도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내주셨다. 4호의 [육체노동, 그 자본주의적 의미], 11호의 [한국의 학문기반 조성을 위한 하나의 성찰: '세계화'와 한국학 본거지 구축], 18호의 [민주주의: 성찰적 전망}, 20호의 [자유를 위한 기획을 꿈꾸며] 등 직접 기고도 자주 하신 편이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중에 막바지 편집 준비를 하는 이번 37호 발간사가 선생을 위한 추모사가 되는 것은 꼭 선생님과 {문화과학}의 인연이 남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생은 우리들 사이에는 그냥 '선생님'으로 불리는 어른이었다. 장례준비위원회가 선생을 공식적으로 '민중의 스승'으로 칭하기로 한 것은 진보적 사회과학계는 물론이고 진보 학계 전반, 나아가 민중운동진영 전체의 어른으로서 보여준 인품의 넉넉함을 반영한 것이리라. 하지만 선생은 민중의 스승이기 이전에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고자 하는 민중의 벗이었다. 선생은 인터넷 아이디가 '불나비'다. 자유의 불을 찾아 제 몸을 불사르는 벌레의 이름을 자기의 아바타로 선택한 것은 선생의 평소 몸가짐을 이해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그것은 민중의 스승이 되기 이전에 스스로 몸을 사르려는 의지의 발로였을 것이다.
선생은 '민중의 벗'이면서 '영원한 청년'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호의 주제가 '위기의 청년'임을 생각할 때 선생을 '청년 김진균'으로 기리는 것이 과히 부적절하진 않으리라. 선생은 평생 봉직한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들만이 아니라 그와 접한 젊은이들, 후배교수들 모두의 사표였다. 우리가, 혹은 적어도 내가 선생을 드물게 존경하는 선배교수로 모신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드러나는 그의 새로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보안사가 불법적으로 모아 물의를 일으킨 정보파일에서 선생을 가리켜 '외골수'라고 한 적이 있다. 선생이 같은 연배나 연하의 수많은 사람들이 변절한 것과는 달리 '노선'을 꿋꿋이 지켜온 점이나, 처음 학문을 시작했을 때 보수적인 '근대화론'에서 갈수록 진보적 입장을 취해온 것을 생각하면 선생의 삶은 외곬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외골수'는 선생이 더 나은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해왔다는 사실과 너무 다른 이미지를 말해준다. 나는 선생이 진보진영의 큰 어른이 된 것은 사회의 복잡함만큼이나 어려움이 많은 진보의 길을 걸으면서도 언제나 활기찬 청년 마음을 간직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생이 어느 한 순간인들 몸과 마음을 나태하게 가지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농성을 하는 자리이건, 시위 현장이건, 등산 중이건, 식사 중이건, 술자리이건 가리지 않고 선생은 끊임없이 온 몸을 쓰는 분이었다. 잠자리 정리, 주변 청소, 산보도 누구보다 먼저였고, 식탁에서 수저 놓기, 양념 치기도 어느새 선생의 몫이었으며, 공부나 논의 주제를 발굴하는 데도, 무슨 일이건 문제를 파악하는 데도 먼저였던 것이 선생이시다.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라는 가사가 든 <불나비>를 즐겨 부르던 활력의 상징, 그는 청년 김진균이었다.
추모사가 된 이 발간사를 쓰는 지금 청년 김진균은 가고 없고, 살아남은 청년들은 위기에 빠져 있다. 위기에 빠졌다 하더라도 살아남은 자에게는 의무가 있는 법이다. 죽은 청년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작업은 새로운 발간사를 쓰는 일이기도 하다. 청년 김진균을 텍스트 삼아서 살아남은 자들이 써야할 발간사, 그것은 오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사회라는 책에서 구성해야 할 또 '다른 시대'가 아니겠는가. 위에서 본 것처럼 발간사를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 지금 요청되는 애도와 추모는 어떤 빚을 청산하는 작업인지 모른다. 청년 김진균에 대한 빚,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가버린 김진균에게 갚아야 할 것으로서 다가오는 미래의 시간에서 펼쳐야 할 어떤 것이다.
청년 김진균은 진보적이었다. 그의 젊음이 오늘의 지배적 질서 속에서 다른 시대를 여는 힘으로 작용한 생산적 효과다. 오늘 살아남은 청년에게 주어진 추모의 빚은 이 다가올 민주주의를 열어야 하는 의무일 것이다. 청년은 오늘의 지배적 질서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일환, 데리다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현재의 자신과의 비동시성"이다. 현재가 자신과 동시적이 아니라 함은 현재는 이미 자신이 아닌 것과 조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언제나 이미 그것과 동일하지 않은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거나 그것 자체 속에 타자를 내포함을 의미할 터이다. 한 사회를 놓고 볼 때 이 비동시성, 비동일성의 가능성은 당연히 현존하는 지배질서 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변혁세력에게서 나온다. 변혁세력은 오늘의 사회를 바꿀 다가올 민주주의나 그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위기에 빠져 있지만 살아남은 청년, 생존하기 때문에 애도와 추모의 의무를 진 청년은 이 세력의 주력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다른 시대를 열어야 하는 빚진 존재로서 자신의 의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청년 김진균은 뒤늦었던 사람이다. 그는 청년들보다 더 청년이었지만 늘 당대의 청년들보다 뒤늦었다. 하지만 뒤늦음으로써 그는 계속 더 청년으로 남아 '진보'를 이루었다. 오늘 위기의 청년들이 청년 김진균에게 진 빚이 있다면 그들은 그보다 더 뒤늦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김진균 선생이 청년으로서 열고자 한 시대와도 또 다른 시대까지 열 수 있을 만큼 말이다.
2004년 2월 16일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강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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