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영원한 청년, 김진균
최갑수 (서울대교수, 서양사)
김진균 선생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의 외모가 범상치 않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외모라기보다는 '풍모'라고 해야 옳으며, 분명 당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풍채에 비하면 그의 말은 참으로 어눌하다. '신언서판'이라는 전통적인 평가기준으로 보자면, 결정적인 결격사항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턴가 이 '신언'의 대비가 선생의 인품을 반영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언행의 일치라는 지식인으로서는 놓쳐서는 안 될 삶의 자세를 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나싶다.
선생의 사상적 역정은 상례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젊었던 한때 데모좀 하다가 나이가 들면 보수화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가 속했던 '4 19세대'의 대부분의 인사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근대화론자에서 출발하여 산업사회의 계급모순과 씨름하다가 '작은 주체들(소수자들)'을 포용하기에 이른 '원통(圓通)'의 세계를 개척한 인물이다. 경이로운 것은 그가 이런 역동적 변화를 삶에 안주하게 마련인 40대 이후에 일으켰다는 점이다. 시대적 상황이 한 몫을 하였지만, 그것을 실천적 고민으로 이끌고 결국 학문의 세계와 사회운동의 현실 그리고 개인적 삶의 세 차원에서 풍성한 일관성을 이룩했던 것은 그의 인격의 힘이었다. 그는 참으로 장년과 초로의 시기를 청년으로 살았던 것이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이런 변화가 학문적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던 1980년대 전반기였다. 광주항쟁 직후의 암울한 상황을 해직교수로서 온몸으로 살았던 그는 '민중에 대한 계급론적 접근'을 주도하여 '산업사회학'을 정립하고 많은 유능한 제자들을 키워냈다.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에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조직하는 등 지식인운동의 새 틀을 제시하는 한편에 민주노조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속에서도 그는 민족문제를 실천적 과제의 하나로 끌어안았고, 그러기에 그는 비판적 지식인 전체를 대표할만한 품새를 갖추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러나 선생의 이력으로 보면 당연하게도 그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21세기의 새로움을 품어냈다. 인터넷을 새로운 연대 및 소통의 형태로 주목하여 그것의 구현을 위해 몸소 실천했는가하면, '세계화'의 드센 추세를 넘어서는 문화적 실천, 그 가운데서도 '한국학의 기지'를 위한 우리 대학의 방향전환과 새로운 역할을 제안하였다. 이쯤이고 보면 그는 차라리 '영원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지만, 참으로 선생의 존재를 빛나게 하는 것은 그런 변화 속에서 그가 언제나 '인간적 성실함'이라는 중심을 견지했다는 점이다. 그의 성실함은 단지 자신의 삶을 꾸준하게 가꾼다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나는 모든 이를 '정성스럽고 참되게' 대하는 그야말로 '원통의 세계'를 일상에서 이룩하는 것이었다. 사람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세계, 이것이 바로 인간 김진균이 꿈꾸었던 '상자이생(相資以生)'의 경지이며, 실제로 그는 자신의 주위에 그런 소우주를 펼쳐보였다. 낮고 말수가 적은 어눌한 목소리로 상상력과 실천의 풍채를 들려주고 보여준 그의 삶의 무게가 더 없이 버겁게 느껴지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산으로 남았다. 그것을 더 큰 '너른 마당'으로 인도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선생이여, 부디 영면하소서. ('시사저널', 2004년 2월 15일 작성)
